동명유래-원서동
- 서울 종로구 원서동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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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무휴
- 비용 무료
상세정보
(1) 동(洞) 유래 및 변천
원서동의 동명은 1936년 동명 개편 시 창덕궁의 후원 서쪽에 있다고하여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원서동의 동명이 이루어지기 전 이 지역의 동명은 원동(苑洞) 또는 원동(院洞)으로서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다.
조선 태조5년(1396) 한성부를 5부(部) 52방(坊)으로 나눌 때 지금의 원서동은 한성부 북부 광화방(廣化坊)과 양덕방(陽德坊) 지역이었다.
영조27년(1751) 9월에 만든 도성의 각 동계(洞契)를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3군문에 분속(分屬)하여 유사시 동민들을 출동, 방어하게 하고자 만든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북부 광화방 광화방계와 양덕방 양덕방계였다.
고종4년(1867)에 간행된 『육전조례』에는 북부 광화방 화동계와 양덕방 계생동계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로 한성부의 5부가 5서(署)로 고치고 많은 동(洞),계(契)를 신설함에 따라 한성부 북서(北署)양덕방 계생동계의 계동과 광화방 관현계(觀峴契)의 관현, 원동이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거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뀜과 동시에 경기도의 관할구역으로 격하되었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북부 양덕방(陽德坊), 광화방(廣化坊) 지역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거 경성부의 186개 동(洞),정(町),정목(丁目)의 명칭과 구역을 개편할 때 경성부 북부 원동, 관동, 계동 각 일부를 합쳐 원동(苑洞)으로 하였다.
같은 해 9월 29일 경성부조례 제8호로 북부출장소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고 이듬해 6월 1일에는 북부출장소의 폐지로 경성부 원동이 되었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와 경기도고시 제32호로 동명과 관할구역이 대폭 개편될 때 경성부 원서정(苑西町)이 되었고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구(區) 제도가 실시되면서 종로구역소 원서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서울시헌장과 미군정법령 제106호에 의해 일본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꿀 때 원서동이 되었다. 195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6호에 의거 행정동제를 실시 할 때 원서동사무소가 설치되었고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에 의거 계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1975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981호에 의거 가회동사무소의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2) 동네 지명 유래
원동이라는 이름이 보이는 것은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부터이며 1914년에는 관상감(觀象監)이 있던 원서동 206번지 일대를 관상감골 혹은 관동(觀洞), 제생원이 있던 계동 140-2번지 현재의 원서공원 일대는 계동(桂洞) 혹은 제생동(濟生洞),창덕궁 요금문(曜金門) 밖에 함춘원(含春苑)이 있었으므로 일대를 원골 혹은 원동(苑洞)이라고 불렀다.
한편으로는 창덕궁 밖에 정업원(淨業院)이 있었기 때문에 관동(館洞)과 대비, 원동(院洞)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원동(苑洞)이 되었다고도 전한다.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한 조선사회에서도 왕궁 지척의 장소에 자리 잡은 이 정업원만은 왕실의 비호를 받는 유일한 불교의 전당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성종 때 이곳 정업원의 노비가 180여명에 이르렀으며 명종 때에는 많은 인력, 물력을 동원하여 인수궁(仁壽宮)을 정업원 경내에 짓기도 하였다. 정업원이 있었던 만큼 이곳의 동명을 유학(儒學)의 본산인 성균관이 있던 지역의 동명 관동(館洞)과 대비하는 원동(院洞) 또는 정업원동이라 하였다.
원서동은 동으로 와룡동, 서쪽은 계동, 북쪽에 청운동이 있으며 남쪽은 율곡로를 경계로 운니동과 마주보고 있다. 창덕궁 담을 따라 세로로 길게 형성된 전형적인 주택지구이다.
출처 : 『종로의 역사˙문화 유산』, 종로문화원(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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